김우중 체포결사대 체포결사대가 2월 23일 프랑스로 출국하였습니다.
번호 : 34
글쓴날 : 2001-03-03 06:13:27
글쓴이 : 국제결사대 조회 : 7206
제목: 국제결사대의 파리생활 이야기(1)

국제결사대의 파리생활 이야기(1)

갑작스런 출국 결정과 출국 유보, 그리고 다시 출국
연일 거리시위를 벌이다 갑자기 옷가지를 챙겨 먼 이국 땅 파리로 간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았다. 공항을 가득 메운 기자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출국 수속을 하고
비행기표를 받아들고 나서야 '드디어 떠나는구나' 싶었다. 

공항에서 우리의 출국을 준비했던 사람들이 우리 손에 쥐어 준 건 오직 왕복
비행기표 뿐이었다. 많지는 않겠지만 얼마라도 유럽에서의 활동비를 책정했을
것으로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급히 통장에 있던 돈 50만원을 찾았다. 이 돈으로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싶었지만 대안은 없었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리자 홍세화 선생님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기자들 사이로 예의 따뜻한 미소로 말없이 우릴 지켜보고
계셨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루 앙리 쉬브로 2번지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ATTAC의 활동가가 해외 체류 중이어서 비어있는 아파트였다. 공식적인 결사대원
3명, 통역을 위해 같이 간 이기 김, 우리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네덜라드에서
날라온 장광렬 민주노동당 당원, 그리고 동행취재를 위해 출국한 김성식 피디.
이렇게 6명이 생활이 시작됐다. 

답답한 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매일 우리의 활동을 인터넷을 통해 올리기로 했는데 프랑스는 우리와 달리
대부분이 전화선을 사용했다. 사진 1장을 올리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동영상을 올리거나 보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하지만 인터넷에 연결해 우리의
활동내용과 사진을 매일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알리고 우리 동지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투쟁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린 감격해했다. 

서너명의 가족이 생활하는 집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빽빽이
짜여인 일정 때문에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는데 늘 화장실이 말썽이었다. 매일같이
밤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오게 돼 씻는 것도, 양말을 빨아 너는 것도, 샤워 한번
하는 것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우린 길거리에서 떠들고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졸음을 달랬다. 

집회장소로, 간담회 장소로 이동하는 일도 쉬운 게 아니었다. 주로 홍세화
선생님과 베르벤느의 차를 이용했지만 어떨 때는 전철을 이용해야 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파리전철은 정말 복잡해 갈아타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뭐니뭐니해도 먹는 게 제일 골칫거리였다. 
아파트에 들어오던 첫날 우리는 집에서 가져온 라면과 김치와 고추장을 모두
꺼냈다. 그리고 가급적 돈을 아끼기 위해 아침과 저녁을 해먹기로 했다. 장광렬
동지를 총무로 선출하고 각자 조금씩 갹출해서 공동생활을 하기로 했다. 

주방장은 당연 유만형 대장의 몫이었다. 주방장은 전기밥솥이 없는 집에서
능숙하게 밥을 해냈고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끝내주는 맛을 내는
된장국으로 연일 우리를 기쁘게 해 주었다. 

3일만에 준비해 온 김치와 쌀이 동이 났다. 홍세화 선생님과 중국 슈퍼마켓에 들러
쌀과 야채를 샀다. 라면은 한 박스를 샀다. 김치가 그리웠지만 대신 우리에겐
고추장이 있었다. 
프랑스의 커피는 마치 한약을 먹는 것 같았다. 피곤하고 졸릴 때면 한약과 같은
커피도 달고 맛있었다. 무엇보다 수돗물을 그냥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파리에 온 지 5일째 되던 2월28일, 유만형 대장은 뿌리만 남은 몇 조각의 김치에
참치를 섞어 김치찌개를 내놨다. 우리 활동의 중간평가를 하면서 서울에서 가져온
소주를 내놨다. 6명의 식구가 옹기종기 둘러않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에
맛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 국제결사대 대원 박점규 -



글쓰기 답글쓰기 수정하기 지우기
 
홈으로 이전글 목록 다음글

Contact to Webmaster || Copyleft by 대우자동차 공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