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 동지들에게
대우 노동자들의 투쟁이 마침내 "태풍의 핵"으로 등장했다.
노조는 부도 이후 근 2년간 "해외매각 반대, 공기업화, 자동차 산업 정상화"
따위의 애국주의 슬로건에 사로잡혀 있다가, 결국 지난 해 해외매각조차 무산된 후
파산위협에 굴복하여 "구조조정 합의안"을 받아들여 버렸다. 그리고 4.000명에
달하는 조합원들이 의원퇴직이라는 강제적 조치에 의해 해고되는 시점에서도,
"경영개선, 국민기업화, 순환휴직제" 등을 요구하다 결국 최종적으로 1.750명에
대한 정리해고 통보를 받고서야 투쟁에 임한 것이다.
현재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을 핵심동력으로 한 투쟁은 매우 결사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대공장 노동자들 역시 처절한 생존권 위협
앞에서는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며,
나아가 대공장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얼마나 위력적이고 웅장한 투쟁이 되는지를,
사실 "외형만으로" 볼 때는 혁명적 가두시위와 폭동적 반란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 대공장 노동자들의 동참없이 혁명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대공장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봉기할 수만 있다면 혁명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우차 노조의 투쟁을 혁명적 투쟁으로 볼 수는 없다. 대우
노동자들은 2년 동안의 지리한 공방전과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 전투를 거치며
매우 지친 상태이며, 더욱이 지난 12월 합의안은 노동자들로서 최소한의 자존심과
투쟁의지조차 빼앗아 버렸다. 대우노조의 배신은 조합원들을 완전히 무력하게
거세시켜버렸던 것이다.
이는 현재 해고에 직면한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투쟁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이 해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다는
점이 반증한다.
부평공장에 공권력이 침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산공장에서는 조합 간부들을 포함해
60여명만이 항의집회에 참여했다.나머지 1.200명은 정상조업했다. 창원 공장에서도
극소수의 조합원들만이 부분파업에 동참했고, 부산공장과 동래공장에서도 각각
잔업거부와 간부파업 정도에 머물고 있다. R/V정비지부를 제외한 정비지부 역시
파업에 동참하거나 최소한의 항의집회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현재의 상황"으로만 볼 때는 부평공장의 파업은 고립되고 있으며,
해고자들만의 투쟁으로 전락할 소지가 있다. 더욱이 현 집행부를 배타적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는 우익개량주의자들에 의해 이러한 상황은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이 있다. 현 노조 간부들을 비롯해, 좌익 조합주의자들은 소리 높여
소극적인 조합원들과 반동적인 지부 간부들을 질책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이야말로 이제껏 조합원들의 의식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동료들과
경쟁하도록 내몰고, 자본과의 타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다. 아니 호들갑스러운 전투구호들로 치부를 가리고 있다.
한편 자본과 정부가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공권력을 투입하고,
조합원들의 모든 행동을 원천봉쇄하고, 심지어 통신공간마저 교란시키고 있는 것은
대우문제가 자본에게서 얼마나 중요하고 사활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계급적 운명을 걸고 대우 노동자들과 조합을 살해하고자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공격전술"에는 어느정도의 "자신감"이 묻어 있다. 위의 상태,
즉 대우 노동자들의 패배적이고 비계급적인 의식과 노조의 지도력 부재,
활동가들의 후진적 의식 등을 믿고 자본은 함부로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본과 정부의 오만에 의한 "무리수"이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로선" 자본가들에게 칼자루가 쥐어져 있다. 그것이 아무리 낡고 무딘 칼날을
가졌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저앉거나 투쟁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그것은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무덤 속이지만, 그 땅을 비집고 돋아나는
강철새잎을 짓밟아 버리는 짓이다. 이 새잎이 모진 비바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지, 아니면 시련을 거름삼아 위풍당당한 거목으로 성장할지 함부로 추측하거나
재단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현재의 시점에서는 무조건 이 씨앗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양분들 공급해야 한다. 그것만이 또 다른 무덤들을
만들지 않는 길이며, 만에 하나 이 투쟁이 중간에 꺾여 초라한 몰골로 오랫동안
서있어야 할 저주받은 고목이 된다해도 최소한 다른 나무들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태를 극복하고 최소한의 승리조차 따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대우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조합주의 의식과 단호히
싸우는 것이다. 이제껏 그들의 투쟁의지와 계급의식을 갉아먹어온 벌레들을
죽여없애는 일이다.
일차로 해고노동자들 스스로가 이번 투쟁은 자신들의 일자리만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대우노동자들과 전체 노동자 계급의 생존권을 지키는 문제임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이제껏, 자본이 조장하고 노조가 방조한 이데올로기, 즉 개인의
일자리와 임금문제만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던 이데올로기를 지금부터는
철저히 버릴 필요가 있다.
물론 투쟁의 주체는 자기자신이고 개인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은 투쟁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개인이기에 앞서 계급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당면한 공격은 결코 개인에 대한 징계나 해꼬지가 아니다. 해고자들중에
개인적으로 불성실했거나 자본가에게 밉보여 해고되었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현재의 공격은 바로 계급에 대한 공격이며, 해고자들은
종업원이기 이전에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에 공격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적으로 방어하지 않는 한 자신의 생존권도 사수할 수 없다는 의식을 확고히
세워야 한다.
다음으로 군산과 창원, 동래, 부산, 정비 지부의 노동자들에게도 이러한 의식을
"선전·선동"해야 한다. 무작정 파업이 길어지고, 대오가 확대되고, 여론이
들썩이면 그들이 동참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더욱 더 노골적으로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자신의 일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동료들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계급적 본능과는 정반대의 행동이다. 그러나 계급적 의식 없이 계급적
본능은 쉽게 깨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자본이 강요하는 생존의 위협앞에 노예적
의식이 자라날 수가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끈기있게 계급의식을
호소하고 선전·선동하는 것은 매우 더디고 눈에 뛰지 않는 작업이지만, 그
효과에서는 가히 결정적인 작용을 할 것이다.
공장별 순회선동은 매우 효과적인 전술이다. 그들로부터 처음에는 냉대를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주먹다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계급적으로
포용하지 못한다면 승리는 요원하다는 사실을 냉정히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는
99년 한라중공업의 사례가 모범이 될 것이다. 자신을 밟고 지나간 조합원들을
끝까지 설득하여 마침내 공장점거 파업으로까지 이끌어낸 활동가들의 끈기와
헌신적 용기는 대우 노동자들에게도 절실한 덕목이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투쟁하는 사업장의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그들로부터 계급의식을 배우라는 점이다. 특히 자본과의 비타협적인 게릴라전을
수개월간 벌이고 있는 비정규직 동지들과 연대해야 한다. 이랜드와 한통계약직,
그리고 여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단순히 대우 노동자들의 생존투쟁을 돕기 위해
한시적으로 동원되는 방문객이 아니다. 그들은 현시기 남한 노동자 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실질적인 "지도자"들이다. 그들의 전술은 소규모 투쟁사업장의
특수성으로 취급되어도 좋은 예외적인 에피소드들이 절대로 아니다. 어떤 전술도
그대로 적용되는 수는 없다. 다만 그 전술의 정신들이 이해되고 창조적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전술들은 대우 노동자들을
충분히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다. 그들이 그러한 전술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계급적 정신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장담하건대" 대우 투쟁은 이미 반 이상 승리한
투쟁이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 이랜드 및 한통계약직 동지들 역시 계급연대를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 이미 정규직에 대한 반감 따위는 버린지 오래이고, 남한 노동자
운동의 선봉임을 "정당하게" 자처하고 있는 비정규직 동지들의 활약이 이번 투쟁의
승패를 가늠하는 핵심 열쇠이다. 동지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열정과 경험,
무엇보다 계급의식을 대우 노동자들에게 전달하라. 필요하면 그들을 가르쳐라.
동지들은 이미 모든 노동자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인식하고 싸우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자격과 능력이 있다. 위용있게 행동하라. 지도자는 바로 당신들이다.
단,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과장하지 말고 연대하라"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대우 투쟁은 매우 어려운 조건과 불리한 상황에서 출발했다. 대우 노동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노출되어 있었고, 바로 얼마전까지도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쉽게 동지들처럼 행동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동지들의 상투적 구호가 되고 있는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 "동료들이 맞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 "전계급의 승리 없이 조합의
승리는 없다"는 의지를 쉽게 기대해서는 안된다. 매우 오랜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최소한 2년 동안의 후퇴를 만회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의 전투적 행동에
감상적으로 압도되어선 안된다. 민주노총을 비롯해 소위 대공장 노조들의
호들갑스러운 선전포고를 그대로 신뢰해서도 안된다. 의연하게 연대하라! 산전수전
다 겪은 200일 투사들 답게 행동하라! 반신불수된 동지를 위해 타협할 수 없는
전사들답게 행동하라! 동지들이 걸어온 길을 가장 압축적으로 걸을 수 있도록 돕고
협력하되, 그 지리한 과정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조급해서는 안된다.
다만 다음의 문구만 기억해두자. "파업의 하루는 일상의 몇 달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민주노총 및 각 연맹의 관료주의자들이나 좌익 조합주의 세력들과의
연대는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크게 기대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그들이 지도의
"전권"을 장악하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곱씹어야 한다. 물론 지금 당장 그들을 몰아내거나 노조 지도부를
갈아치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 지도부의 권위를 세워주자. 단, 그들의
권위는 투쟁하는 노동자와 조합원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인식시켜야
한다. 조합원 민주주의, 총회, 분반토론 등은 투쟁의 방향과 전술을 결정하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결정적인 형식이 되어야 한다. 대우 조합원들을 비롯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판단하기에 지도부가 진심으로 투쟁하려 한다면 모든 신뢰와 지지를
몰아주어도 상관없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지도부가
투쟁 전선을 조금이라도 이탈하려 한다면 그때 즉시 비판하자. 여기서도 이랜드와
한통 계약직 동지들의 모범이 교사 역할을 할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지도부를
강제해 갔는지, 어떻게 지도부는 조합원들과 노동자들을 대표해서 권위를 획득해
갔는지를 배워야 한다.
대우 투쟁은 거대한 투쟁인가?
그렇다. 그것은 전체 남한 자본주의를 뒤흔들고 있으며 노동자는 물론 자본가들도
이 투쟁의 향방에 따라 자신들의 생존을 우려해야 할만큼 거대한 투쟁이다.
그러나, 대우 투쟁은 혁명적 투쟁인가?
아직은 아니다. 이 투쟁이 혁명적 투쟁으로 성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조합주의가
아닌 혁명적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지금 즉시
이랜드와 한통계약직을 비롯해 비정규직 투사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어떻게
투쟁해왔는지 묻고 느껴라!
이것이 바로 대우 투쟁이 승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보다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쓰지 못한점, 그리고 급하게
서술하다 보니 명령조로 서술한 점 등에 대해 대우 조합원 및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
